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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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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폼페이 화산의 폭발

    폼페이 화산 폭발 당시의 로마는 서기 79년 8월 24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인구 약 2만여 명의 도시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네로 황제의 통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폼페이는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로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위치한 나폴리 만 연안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도시로였으며 번성한 무역항이자 휴양지였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화려한 건축물, 풍요로운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였습니다. 폼페이는 화산이 폭발 하기 전인 서기 62년에 이미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다시 번영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결국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베수비오 화산은 서기 79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분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화산이 잠복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폼페이 시민들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전조가 있었지만 폼페이 시민들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사람들은 화산 폭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폼페이는 화산이 없는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산 폭발의 위험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화산 폭발 이후의 로마 

    나폴리 인근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로 인해 고대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스카파티 등은 순식간에 잿더미에 묻혔고, 약 2만 명의 주민이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화산 폭발로 인해 로마의 경제와 사회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등 중요한 상업 도시가 파괴되면서 로마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도시의 파괴는 로마의 무역에도 큰 타격을 주었으며 로마 제국의 주요 관광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의 관광 산업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화산 폭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특히 당시 로마인들이 믿고 있던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화산 폭발 이후 곧바로 피해 복구에 나섰으며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재건을 위해 많은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었고, 인해 파괴된 도로와 건물 등을 복구 하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산 폭발의 위험을 경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화산 폭발에 대비할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했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은 로마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로마는 이를 극복하고 더욱 발전해 나갔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은 로마가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사회를 더욱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폼페이의 발굴

    폼페이의 발굴은 1592년 이탈리아에서 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발굴자들은 폼페이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고, 단순히 로마 시대의 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폼페이의 전체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야 폼페이의 발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정부는 폼페이의 발굴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발굴을 적극적으로 진행 했습니다. 1860년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 책임자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하였는데 피오렐리는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폼페이의 발굴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화산재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다음, 층마다 주의 깊게 발굴하였습니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피오렐리의 오랜 노력으로 결국 폼페이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861년에는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1870년대에는 주택, 사원, 상점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폼페이의 약 1/3이 발굴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발굴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 현재는 약 2/3이 발굴되었습니다. 폼페이 유적을 통해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 모습, 문화, 예술 등을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으며 화산 폭발의 참혹한 피해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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