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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내가 20대 후반에 읽다가 포기한 책으로 당시 책의 문장들이 너무 장황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평소 소설보다는 비문학 서적을 주로 읽다가 올해 초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게 된 일당백(일생동안 당신이 읽어야 할 백 권의 책)이라는 영상을 통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많은 문학 평론가, 소설가, 그 외 많은 유명인사들이 역사상 최고의 소설중 하나로 이 책을 꼽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근 이 책을 완독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스토리의 구성, 짜임새, 긴장감 등 소설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들도 훌륭하지만 철학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자들에게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내면과 이중성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블로그에서는 스토리의 흐름에 대한 감상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나누고자 했던 철학적 질문들 중 몇개를 골라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남기고자 작성하였다. 

     

     

    1. "난 그저 신에게 그 입장권을 극히 정중하게 반납하는 거야"

    이반의 위선과 이중성 

    표도르의 둘째 아들 이반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동생 알료샤와 술집에서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이야기 중 하나는  아무 이유 없이 고통받는 순수한 어린이들에 대한 이반의 생각에 관한 것이다. 이반은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학대받고 살해되는 현실을 방조하는 신은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 어른들이야 살면서 죄도 짓고 잘못도 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 있지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한동안 이 세상에 일어나는 너무나 많은 부조리들을 보면서 신이 있다면 신은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 두는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반의 이러한 논리 전개는 상당히 촘촘해서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이반의 논리에 대해 반박은 커녕 그 논리에 금방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해가 잘 가지 않고 찜찜한 느낌이 있어서 두 번 더 읽어 보았는데 이때 저자는 내가 처음 느꼈던 이반에 대한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부분을 두 번 더 읽고 나서 나는 이반이 심각한 나르시시스트, 위선자, 그리고 변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자는 이반의 논리에 독자가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함정(?)을 파 놓았지만 빠져나올 수 있는 장치도 설치해 놓았다. 내가 이반에 대해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수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때문이다. 

     

    이반은 잔인하게 살해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흥미롭게 수집'하고 있었으며 신문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이와 관련된 일화를 수첩에 메모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정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고통을 나누고자 했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지만 이반은 방구석에서 이러한 기사를 스크랩하며 신을 공격할 괜찮은 증거를 찾을 때마다 만족해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세상의 조화를 위해 아이들의 눈물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 조화와 신의 입장권을 거부한다는 근사한(?)말을 하는데 이 부분에서 이반에 대한 나의 생각은 "X랄하고 자빠졌네"였다. (이보다 더 나의 감정을 확실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이반의 이야기가 위선적인 이유는 어린이들의 고통에 대해 이반 자신은 1%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기사들을 신을 공격할 재료로만 사용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적, 도덕적 나르시시즘을 채우면서 어린이들의 고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신에게만 던져놓고 자신은 신을 비판할 위치에 서서 (이반 자신은 이를 통해 신의 위치에 오르려고 하고 있다) 본인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인양 포장하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취해 있다는 것이다. 이반에게 어린이들의 고통에 대한 기사들은 자기만족을 위한 얼마나 편안한 도구란 말인가.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 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반이 말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방구석에서 타인들의 고통을 보며 신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세상을 비난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지적, 도덕적 나르시시즘이자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소비하는 고통의 포르노그래피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반의 사랑은 '바로 옆에 있는 타인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 이반은 알료샤와 헤어지고 하인이자 이복동생인 스메르쟈코프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반이 얼마나 스메르쟈코프를 경멸하고 증오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왜 내 옆에 없는 타인은 사랑 할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웃)은 사랑할 수 없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만나지 않고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웃, 혹은 인류에 대한 사랑은 나의 희생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도덕적 우월감이나 만족을 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함은 물론, 나의 편안함과 자존심까지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며 우월감은커녕 나 자신이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는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나의 이반을 향한 냉소는 정당한 것인가? 이반이 이야기 한 대로 멀리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이웃은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부터 나는 자유한가? 솔직히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머리로만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부터 얻게 되는 도덕적 우월감은 너무나 달콤한 정신적 마약이다. 이 우월감을 마약이라고 표현 한 이유는 그것에 몰두할수록 나의 내면은 이반의 말로처럼 공허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이러한 정신적 우월감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도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면 신(성경의 하나님) 과의 관계는 어떤가. 우리는 신은 눈에 보이는 이웃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맺어진 나와 일대일의 관계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인간이 이웃과의 관계를 건너 뛰고 바로 신과 대면 하려는 편리하고 단편적인 생각을 생각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생각을 다시 이웃에게로 돌려 보낸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또한 이반은 인류의 조화를 위해 아이들의 눈물과 고통이 필요하다면 신이 만든 세상을 거부하겠다 (입장권을 반납 하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아이들의 눈물과 고통이 왜 인류의 조화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 이것은 가정법이며 이 논리를 이반은 증명하지 않은 채 바로 "신을 거부하겠다"는 결론적 본심으로 넘어간다. 이반이 이야기한 여러 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기사와 스크랩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을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치에 있겠다는 망상적 빌드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저자는 현실의 고통과 희생을 겪어내지 않은 인생, 그리고 실제적인 사랑이 없는 순수 이성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는데 이반의 정신적 우월 의식과 그 뒤에 숨겨진 불안은 결국 스메르쟈코프에 의해 완전히 까발려지고 박살이 나고 만다. 그리고 이반의 사상을 추종하던 스메르자코프 역시 이반의 생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허무한 것인지를 알게 되자 그 충격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저자는 이반의 이중성을 폭로했지만 동시에 독자들에게도 우리의 도덕적 이중성과 이웃 사랑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2. 대심문관 : 인간의 자유는 통제되어야 하는가

    16세기 세비야에 등장한 예수 

    이반이 만든 '대심문관'이라는 제목의 서사시는 예수가 종교재판이 극심했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에 등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페인은 700년 이상 지속된 이교도(무슬림)의 침입과 지배가 있었지만 15세기에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잔존하는 혹시 모를 반란의 불씨를 제거하고 카톨릭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300년 이상 종교재판을 시행했다.) 이야기 속의 세비야는 대심문관(대주교)의 권위가 강력한 곳으로 일반 백성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는 상징적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곳에 예수가 다시 나타나고 1세기의 예수처럼 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따르려고 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심문관은 예수를 감옥에 넣고 예수가 인간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심문 (사실상 일방적인 비판)을 하게 된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예수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과대평가 하여 인간에게 감당하지 못할 자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 (책에서는 '위대한 정신')이 주려고 했던 세 가지를 거부한 것이 인류에게 행한 커다란 실수라고 주장한다. 

     

    사탄이 인류에게 주려고 했던 빵, 기적, 권위를 거부하고 자유를 선택한 예수

    사실 고통받는 어린이와 관련된 이반의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뒤틀린 시선은 대심문관편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지상의 빵(물질적 안정)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천상의 빵(영적 자유)을 선사함으로써 대다수의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과 혼란, 그리고 반항심만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구하게 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예수는 기적으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대심문관은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오직 자유의지로만 믿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는 제안마저 거부하였는데 대심문관은 이로 인해 보편적이고 강력한 권위 안에서 인간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에서 이반은 자신을 대심문관 혹은 대심문관과 함께 대부분의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소수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으며 나머지 인간들은 그저 자신들의 지배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이반의 타인, 혹은 인류에 대한 지독한 경멸적 시각을 드러낸다. 또 다른 "집구석 철학자"의 망상이다. 

     

    예수의 잘못된 선택들로 인해 많은 인간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인간을 진실로 사랑한 소수의 영웅들이 예수가 거절했던 세가지를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 이로 인해 이 영웅들은 대다수의 인류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놓고 대신 그들에게 빵과 기적, 권위를 공급하면서 진정으로 인간들을 위한 신세계를 구축하였고 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은 평화와 안정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곳이 대심문관 편에서 묘사된 16세기 세비야에 구축된 세계이다. 

     

    "이 자유의 선물을 넘겨줄 대상을 한시라도 빨리 찾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근심거리는 없다." ,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여 살려 주십시오"

    인간은 예수에 의해 주어진 자유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이에 대심문관은 인류를 '불쌍히 여겨서' 빵을 준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동등한 인격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짐승을 내려다보는 주인의 오만한 연민이다. 그리고 이반은 인류가 자유가 없이 빵만 있으면 대심문관을 찬양하며 기뻐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짐승으로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반은 자유를 빼앗긴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간과하고 있지만 이것에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통제되지 않아야 하는가. 

    나는 인간의 자유는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제되지 않은 자유(대부분 쾌락)는 실제로 고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통제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스스로의 통제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반이 말하는 통제는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반납하고 순전히 지배자에게 나의 영혼까지 맡긴 폭력적 통제로 전형적인 전체주의자, 공산주의자, 독재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며 극도의 엘리트주위이자 오만이다.  

     

    이반(대심문관)은 또한 인간에게 스스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잠제력이나 주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만 해도 오랜 기간 도박 중독으로 고통받아 왔지만 (아내의 도움으로) 결국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로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다. 소설에서 드미트리도 방탕했던 지난 삶을 후회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과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을 자신의 타락했던 과거를 씻어낼 정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변화하였다. 그루센카 역시 알료샤를 만나며 참회하고 변화하였다.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해도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과거와 다른 삶을 살 것을 결심하고 그렇게 살 수 있지만 이반은 인간의 이러한 주체성도 무시하고 인간을 극도로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신의 통제(성경) vs. 이반의 통제 

    이반이 또 간과한 것은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만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이 할 수 있는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 등을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그 자유를 상당히 많이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은 이반의 그것과는 근본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제한이다. 성경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족쇄가 아니라 '파멸과 중독'으로부터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며 인간 스스로 쾌락을 절제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자라나게 하는 훈련이다. 그 근원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지만 이반의 통제는 인간을 그저 순종적인 가축처럼 살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인간으로서 고뇌하고 성장할 기회 자체를 박탈해 버린다. 기본적으로 이반의 철학은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멸시가 깔려 있고 이들은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자신이 던저주는 빵이나 받아먹으면서 살아야 할 짐승과 같은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이반의 철학이 보여주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과 신의 단절이다. 신과의 단절은 인간 존엄성과의 단절이며 그 빈자리를 지배자(대심문관, 권력자)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독재 정치가 이와 가장 비슷한 구조이다. 예전에 독일 바이어가 해 준 이야기에 의하면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당시 서독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은 제 3국이 아닌 동독으로 가야 했는데 공산체제 하에서 태어났던 젊은 세대들이 기독교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것 처럼 공산국가에서 지배자들은 종교를 몰아내고 대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인간을 통제하는 악랄한 악마가 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3. 이반은 고통받는 자이다. 

    대심문관 편의 오류

    대심문관이 만들어 놓은 16세기 세비야는 인류를 위해 행했던 예수의 세가지 선택을 모두 뒤집어서 만든 세계이며 그는 이 세계가 인간에게 이상적인 곳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대심문관은 예수의 등장으로 예수가 기존의 자신의 선택을 인간들에게 다시 설파할 것을 염려하였다. 당시 극심했다고 하는 종교재판이라는 것은 결국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교도라고 불리는 자들을 처단하면서 지배층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중요한) 수단인데 예수는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이교도의 끝판왕'인 것이며 그의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당장 화형에 처해야 할 인물이다. 예수를 가둬놓고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느냐"며 온갖 일방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내일 화형에 처하겠다고 강경하게 이야기하지만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심문관에게 입맞춤을 한다. 이에 대심문관은 심한 내적 동요를 일으키며 예수를 풀어주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이 대심문관 이야기(서사시)는 이반이 만든 이야기로 이반의 원래 논리대로라면 예수를 화형에 처하고 대심문관의 완벽한 승리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가 대심문관이 논리에 반박하면 대심문관이 더 완벽한 논리로 예수를 통쾌하게(?) 박살 내었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는 어떠한 말 대신 대심문관에게 위로와 사랑의 입맞춤을 하면서 대심문관은 심한 내적 갈등을 느끼며 예수를 풀어 준다. 이러한 결말은 조시마 장로나 알료샤가 써야 적합한 결말인데 어째서 이반이 이러한 결말을 선택했을까. 

     

    이반이 술집에서 알료샤에게 어린이의 고통과 대심문관 이야기를 하기 전 이반은 알료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너를 통해서 나 자신을 치유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처음 읽었을 때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했지만 두세 번 더 읽고 나서 대심문관 편의 결말과 연결 지어지면서 이반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반은 인간과 신에 대해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인간과 신을 경멸할수록 자신의 고통은 더 커지는 상황이었고 이반은 그 고통을 사랑을 통해 치유받고 싶어 하는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그 고통은 인간(이웃), 신, 그리고 사랑이 부재한 공허함의 고통이다. 이반이 '푸릇푸릇하고 끈끈한 잎사귀들과 푸른 하늘을 보며 생명과 삶을 사랑'할수록 그 고통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vs. 대심문관 

    평생을 크리스챤으로 살아온 나는 대심문관 편을 읽었을 때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떠올랐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 시대에 이반이 이야기하는 16세기 세비야와 유사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이반의 정신 구조는 이들의 위선과 매우 닮아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맹렬히 사랑하였지만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세리, 창녀, 병자, 가난한 서민들)은 철저히 멸시하였다. 이반 역시 '인류'라는 추상적인 이웃에 대해서는 뜨거운 연민을 보내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는 아버지, 형(드미트리), 그리고 스메르쟈코프와 같은 구체적인 타인들은 극도로 혐오한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독점하며 종교적 기득권을 형성했고 서민들은 자신들이 만든 통제된 시스템을 거쳐야만 했는데 이 역시 대심문관의 세계와 흡사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입장에서는 예수야말로 자신들의 세계를 "제대로" 훼방하러 온 사람이며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위선과 악행을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강한 언어로 맹비난 하였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지만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알료샤는 이반에게 연민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뼛속까지 기득권을 유지하며 그 안에서 지배자로 살고 싶어 했으며 이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는 '악당'들이었기에 (성경에는 이렇게 까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추정컨데) 예수는 회초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반은 입으로는 예수에게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고 비난했지만 사실 이반은 신과 사랑을 거부하고 이성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고통받는 자였으며 예수에게 간절히 치유받기를 원했던 혈루증을 앓는 여인, 맹인, 문둥병 환자, 중풍병자였다. 예수는 그 고통과 치유받고자 하는 내면을 알아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치유받지 못하고 스메르쟈코프와 함께 파멸하였지만... 

     

    4. 맺음말. 

    조시마 장로가 강조한 우리 이웃에 대한 실천적 사랑과 타인에 대한 무한한 수용, 그리고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죄인이다" 라는 생각이 이반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반이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당장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해 봐도 사랑은커녕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사랑은 차치하고서 누군가를 그나마 미워하지나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나의 자아를 끊임없이 부수어야 하는 가혹한 노동이기 때문에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관념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어려움을 생각만 하지 말고 당장 현실에서의 나의 작은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루센카가 이야기한 양파 한 뿌리처럼, 알료샤가 일류샤의 고통부터 죽음까지 마음을 다해 위로하고 헌신했던 것처럼. 생각해 보니 성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한 번도 인류나 멀리 있는 타인을 사랑하라고 한 적이 없다. 

     

    이반이 편안한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있던 이유는 아이들의 고통을 자신과 완전히 별개의 대상으로 분리 하면서 실제 아이들이 아니라 이러한 기사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신을 단죄하는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고백하자면 사실 교회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도덕적, 정신적, 신앙적 나르시시즘에 가장 취약한, 어쩌면 위험할 정도로 취약한 곳이다. 교회에서 사랑에 관련된 수많은 설교를 듣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설교에 등장하는 선하고 사랑이 많은 성도의 모습은 정신적으로 나와 쉽게,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동질화시키지만 (이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다) 현실에서는 나와 그러한 성도의 모습은 쉽게 분리되어 살아간다. 

    조시마 장로와 성경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실천적 사랑은 쏙 빼놓고 오랜 기간 설교로 반복된 정신적, 신앙적 나르시시즘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이반의 모습일 것이다. (내 이야기이다) 그래서 조시마 장로가 진짜 사랑을 "가혹하고 두려운 노동이자, 자기 통제"라고 했나 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왜 성경에서 그토록 사랑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 했는지 알 것 같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 여기에 사랑이라는 말은 없지만 이반과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 등등. 인간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인간이 신과 사랑을 저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면서 역설적으로 그 가치를 증명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젊은 시절, 이성과 논리로만 세상을 이해했던 그의 질문에 인생의 말년에 노년의 저자가 건네주는 대답이자 인류에게 주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을 (감히)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신은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리고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자" 가 되지 않을까. 

     

    PS. 이 책은 인간의 본성과 이기심, 위선, 사랑, 구원 등에 대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면서 보여주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의 실체를 드러내는 책이다. 스토리의 흐름은 표도르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 간의 갈등을 통해 전개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위와 같은 철학적, 신학적, 심리학적 고뇌를 집대성한 거대한 질문들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반이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알료샤와 나눈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전체 분량에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책을 다 읽은 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질문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바로 동일한 저자가 쓴 '죄와 벌'을 읽기 시작했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나에게 주는 강력한 정신적인 여파(?)로 인해 죄와 벌의 초반 부분이 한 동안 머리에 안 들어올 정도였다. 

    기독교적 사상과 메시지가 가득 담긴 이 책을 나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와이프에게 꼭 읽어보라고 거의 10번은 이야기 하였는데, (결국 이번 여름에 읽기로 함) 종교를 떠나서 인간과 자신의 깊은 내면, 그리고 인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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