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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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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등장 

    서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기 52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의 유일한 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였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의 영토를 잃었고, 제국의 영토는 소아시아, 발칸 반도, 시리아, 이집트 등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주변의 사산 제국, 훈족, 게르만족 등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야심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뛰어난 장군들을 등용하여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 하였는데 이러한 전쟁은 전쟁은 대부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을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법률의 통일, 행정제도의 정비, 경제 활성화 등 제국의 내실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 기간은 동로마 제국의 황금기라고 평가됩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내실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로마법의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치른 여러차례의 전쟁은 제국의 재정을 크게 소모시켰습니다.

     

    2.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황제였는데 그는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은 2000년 동안 축적된 방대한 양의 판례와 법령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 법률들은 너무 복잡하고 모순이 많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기 529년에 트리보니아누스라는 법학자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트리보니아누스는 120명의 법학자들과 함께 10년 동안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대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534년에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 완성되었습니다. 로마법 대전은 로마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법전으로, 민법, 형법, 행정법, 상법, 절차법 등 모든 법률 분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로마법 대전은 중세 유럽의 법률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의 법률은 로마법 대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영토가 크게 줄어 있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많은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533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535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에 침공하여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535년에는 스페인에 침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권을 확장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영토 확장 정책은 제국의 국력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토 확정 정책은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건축 사업과 문화 발전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화려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결과, 아야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문, 황궁, 성벽 등과 같은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아야소피아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동방 정교회 성당으로, 오늘날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문화 발전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학자들을 후원하고,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문화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로마 문화의 전통이 계승되고, 중세 유럽의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의 통일과 발전, 영토 확장과 제국의 부흥, 건축 사업과 문화 발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황제였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중 한 명으로,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부정적인 평가

    유스티니아누스는 역사가들로 부터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면도 함께 존재 합니다. 첫번째로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들 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서방의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동방에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확장은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서방 정복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 반도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농토는 황폐화되어 재정 수입을 늘리기 어려웠습니다. 북아프리카 정복 역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동방의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많은 비용을 지출하였는데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10년 이상 지속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이는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국토 방어의 실패를 꼽을 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동안에는 다뉴브강 너머로부터 슬라브족과 아바르족 등 이민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는데 슬라브족은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 내륙으로 침입하여 농토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아바르족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대를 증강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였지만 이민족의 침입이 워낙 거세서 로마 제국은 이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국토는 점차 축소되었고, 결국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종교 문제로 인한 내부 분열을 들 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단성론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단성론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단성론을 강제로 관철시키기 위해 교회와 신학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로 인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1054년에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동서 교회의 대분열은 로마 제국의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재건하고 법률과 경제를 발전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영토 확장, 이민족의 침입, 종교 문제 등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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