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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바벨론의 탄생
바벨론의 탄생은 흔히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강 사이'라는 뜻의 메소포타미아는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3500년경 세계 최초의 선진 사회가 출현한 곳입니다. 가장 초기에 알려진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인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2000년경까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영했던 문명으로 이 들은 도시 생활, 첨단 농업 및 인간 문화의 다양한 측면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은 문자, 수학, 천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발전을 이루었으며 바빌론은 수메르 문명의 도시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바빌론은 수메르 문명의 도시국가들로부터 농산물,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고, 금, 은, 보석 등과 같은 귀금속을 수출하였으며 수메르 문명의 도시국가들로부터 문자,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받아들여 발전시켰습니다. 바빌론은 수메르 문명의 영향 아래 점차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하였고 우르, 우루크, 니네베 등 수메르 문명의 주요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는 끊임없는 외부 위협에 직면했고, 이로 인해 바빌론의 부상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일련의 정복과 이주로 이어졌습니다.
2. 바벨론의 전성기와 업적
바벨론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왕의 통치 아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였는데, 함무라비 왕은 강력한 군사력과 효율적인 행정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제국을 확장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업적을 살펴보면 우선 정치적으로 바벨론은 매우 안정된 제국이었습니다. 함무라비 왕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효율적인 행정체제를 구축하였으며, 특히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여 법과 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함무라비 왕은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제국을 확장하였고 효율적인 행정체제를 구축하여 제국의 통치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 최초의 성문법으로, 형법, 민법, 상법, 행정법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을 살펴보면 바벨론 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한 제국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우르, 니네베 등 거대한 도시들을 건설하였고, 고도로 발달한 수리시설과 운하를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였으며 국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우르, 니네베 등을 통해 도시의 인구를 늘리고,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발전한 제국이었는데 문학,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바벨론 제국의 문학은 서사시, 시,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문화적 업적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이슈타르 문과 하늘의 탑입니다. 이슈타르 문은 바벨론 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높이 20미터, 길이 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문입니다. 이슈타르 문은 화려한 조각과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바벨론 제국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하늘의 탑은 바벨론 제국의 신전으로, 높이가 9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탑입니다. 당시 하늘의 탑은 바벨론 제국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신들과의 교감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슈타르 문은 현재 두 곳에서 보관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입니다. 이 문은 1930년대에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바빌론에서 발굴된 벽돌들을 사용하여 재건한 것입니다. 높이가 14미터, 너비가 30미터에 달하는 이 문은 벽돌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으로 유명합니다. 두 번째는 이라크 바빌론 유적에 있는 복원된 이슈타르 문입니다. 이 문은 사담 후세인 정권 때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의 이슈타르 문과에 비해 크기가 작고 아직 미완성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의 유적들을 지키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바벨론 제국의 쇠락
바벨론 제국의 쇠락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는데 그 요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내부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바벨론 제국은 내부 갈등이 심화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함무라비 왕의 뒤를 이어 통치한 왕들도 함무라비 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국을 더욱 발전시켰으나, 점차 내부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부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귀족 간의 세력 다툼, 그리고 종교 간의 갈등이 있으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바벨론 제국의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국의 통치력은 약화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벨론 제국은 외부의 침략에 의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제국의 영토를 잃어갔는데, 특히 기원전 6세기경에는 메디아 제국과 신바벨론 제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바벨론 제국의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바벨론 제국의 국력이 약화되었고, 제국의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들 수 있는데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은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결정지은 사건 이었습니다. 기원전 539년경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켰고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바벨론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으며, 바벨론 제국의 영토는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쇠락으로 인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4. 바벨론의 공중 정원
바벨론의 공중 정원은 기원전 600년경 신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 그의 아내 아미티스 여왕을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미티스 여왕은 메디아 출신으로, 메디아의 산악 지대에서 자랐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은 아미티스 여왕이 고향의 풍경을 그리워할까 봐 공중 정원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공중 정원은 높이 20m, 면적 100m²의 거대한 규모였으며 정원은 여러 개의 선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선반에는 나무와 꽃, 풀 등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정원을 지탱하기 위해 벽돌과 나무로 된 기둥이 세워졌고, 기둥 사이에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밧줄을 따라 물을 끌어올려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바벨론의 공중 정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존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공중 정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 정원은 높다랗게 쌓아 올린 탑으로 되어 있었고, 탑 위에는 나무와 꽃, 풀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샘이 있었고, 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나무와 꽃에 물을 주었다.” 헤로도토스의 묘사에 따르면, 공중 정원은 탑처럼 생겼고, 꼭대기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밧줄을 따라 아래로 내려와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공중 정원은 여러 개의 선반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선반에는 나무와 꽃, 풀 등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정원은 푸른 나무와 화려한 꽃으로 가득 차 있었고, 샘에서 뿜어져 나온 물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바벨론의 공중 정원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이후 바빌론은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정원은 방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바벨론이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정원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바벨론의 공중 정원은 이후 1,500년 동안 잊혀져 있다가 19세기 초 영국의 고고학자 로렌스 올리비에가 바벨론 유적을 발굴하면서 공중 정원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공중 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유적으로 고대 기술과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