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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벌』은 중학생 시절 방학 숙제로 처음 접한 작품이었다. 당시엔 두께 2cm 남짓한 ‘요약본’을 읽었기에, 이번에 완역본을 제대로 다루며 비로소 이 웅장한 분량을 실감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은 장면은 전당포 노파의 살해 장면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원작을 보니 그 사건은 서두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많은 핵심 사유가 생략되어 있었던 셈이다. 앞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마친 뒤 곧바로 『죄와 벌』을 읽었는데 두 대작은 등장인물과 중심 사상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이 글에서는 이전 글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과 마찬가지로 줄거리 요약은 최대한 배제하였으며 작가가 던지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1. 초인이 되려는 자와 신이 되려는 자.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지 얼마 되자 않아 주인공 로댜(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익숙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극단적 자의식에 갇힌 나르시시스트라는 점에서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등장하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사상적 도플갱어였다. 로댜는 관짝처럼 좁고 밀폐된 방에 자신을 고립시켰다. 외부와 단절된 채, 무함마드나 나폴레옹 같은 초인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그가 말하는 초인이란 법과 도덕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발밑에 짓밟을 권력을 지닌 소수의 특권층이다. 로댜는 자신이 그 초인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극심한 가난과 열악한 환경이 그의 의식을 현실 밖으로 튕겨낸 결과였다. 현실 도피의 창구로 ‘초인 사상’이라는 허상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 똑같은 나르시시스트인 이반은 경제적 궁핍은 없었다. 대신 자신의 의식을 신과 동급으로 놓는 우주적 스케일의 환상에 빠져든다. 두 인물 모두 절대자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에고만을 확장했다. 그렇다면 왜 로댜는 초인을 꿈꿨고, 이반은 신이 되려 했을까. 로댜의 경우, 명석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오랜 가난 탓에 재능을 펼치지 못했다. 상처 입은 자존심과 타인을 향한 자격지심, 피해의식이 폭발한 것이다. 이 내면의 결핍은 타인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을 불렀고, 역사 속 정복자들에게 심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이반은 비록 콩가루 집안이었으나 부유하게 자랐다. 타인 위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성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오만함은 인간계를 가볍게 건너뛰어, 곧바로 신과 맞서기 위해 자아를 우주 표면까지 쏘아 올렸다.

     

    그러나 자기 내면을 초인과 동일시하든 신과 동일시하든 결말은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서 신을 거부한 자들의 종말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아를 확장시킨 간극이 클수록 파국의 파괴력은 배가된다. 의식을 안드로메다까지 보냈던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와 내면의 분신(초라한 신사)을 통해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마주했다. 그 순간 그의 에고는 바닥으로 패대기쳐지며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파멸을 맞이한다.

     

     

    초인을 위한 다수의 희생은 정당한 것이며 초인은 타인을 살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터무니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초인’이라는 존재의 실체가 과연 존재하는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로댜가 소위 '초인'이라 부르며 열망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그 실체는 숭고함이 아니라 극단적인 내면의 병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로마의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고대 군주들은 태어날 때부터 절대 권력을 쥐었으나, '무한한 권력'과 '유한한 인간적 한계'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극도의 광기와 편집증에 시달린 정신적 환자들이었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같은 역사의 정복자들 역시 정복욕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수많은 타인을 도구화한 소시오패스적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스탈린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들 또한 본인들이 신이 아님을 잘 알기에, 대중을 폭력과 우상화로 단절시키며 스스로를 끊임없는 암살 공포와 고립 속으로 내몰았다. 이 세 부류 어디에도 로댜가 꿈꾼 웅장하고 자유로운 '초인'은 없다. 스스로 신이나 초인이 되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거부한 자들의 실제 종착지는, 하나같이 지독한 내면의 공포와 광기, 그리고 극단적인 고립뿐이었다. 로댜는 바로 이 비참하고 병적인 상태를 '초인'이라는 이름으로 우상화하며 열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연민을 버리고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비극과 고뇌가 시작된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해 나의 대답은 확실하다. 초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려 만들어낸 신기루이자 우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질문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그 물음 안에는 타인을 폭력으로 지배하려는 욕망과, 다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려는 프레임이 이미 숨겨져 있다.

     

    개념적 우상에 불과한 초인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맞추려 한 로댜의 시도는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 본 만화 『닥터 슬럼프』에는 '우주 대마왕'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부하는 단 한 명뿐이고, 그 부하에게조차 종종 무시당하며 지구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 근근히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우주 대마왕은 자신의 이름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로댜를 보면 그 우주 대마왕이 오버랩된다. 현실은 돈 없는 궁핍한 휴학생이면서, 작은 하숙방에 누워 일할 생각은 안 한 채 "내가 나폴레옹 같은 초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는 영화 대사도 떠오른다)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로댜 본인만큼은 이 사상에 목숨을 걸 만큼 심각했다. 이 집착은 전당포 노파를 '벌레(이)'로 규정하는 데 이르렀고, 결국 살인의 동기가 되었다. 나아가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까지 도끼로 비극을 맞이하게 하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우주 대마왕 "니코챤 대왕"과 그의 부하. 그는 심지어 외모마저 우스꽝스럽다.

     

     

    2. 이반과 로댜의 죄와 벌

    요약본으로 읽던 중학생 시절에는 로댜가 살인을 저질렀기에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을 받은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완역본을 읽으며 저자가 말하는 『죄와 벌』 은 철저히 내면의 실존적 형벌임을 깨달았다. 로댜는 자신을 타인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초인으로 여기고, 타인을 벌레로 규정한 순간 이미 죄를 지었다. 그리고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극심한 내적 공포라는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생각을 한 단계 더 확장하게 되었다. 로댜에게는 초인 사상을 품은 바로 그 순간 죄와 벌이 동시에 집행되었다. 사상을 통해 스스로를 타인과 단절시켰고, 어두운 방에 누워 자격지심이라는 정신적 감옥에 이미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살인을 저지르자 내면에 숨어있던 죄와 벌이 현실 세계로 폭발해 나왔다. 그는 두 명을 죽인 중범죄자가 되었고, 멘탈은 극도로 붕괴했다. 현실에서는 포르피리라는 수사관이 등장해 그의 목을 서서히 조여왔다.

     

    '초인 사상'과 '대심문관 서사시'

    로댜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등장하는 이반은 신과 연민을 거부함과 동시에 죄와 벌을 받기 시작했다. 살인을 통해 파멸이 증폭되었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의 사상은 완전한 도플갱어다. 이반 역시 타인과의 연대와 사랑을 차단하고 절대자(신)를 외면하자, 극심한 고립감과 허무라는 고통에 직면했다. 그리고 동생 알료샤를 통해 구원받기를 갈망했다. (반면 로댜는 극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치유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조차 인지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파멸하거나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말은 극적으로 갈라진다. 한 명은 파멸했고, 한 명은 부활했다. 이반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곁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동생 알료샤가 있었다. 그러나 이복동생 스메르자코프가 개입하면서 그의 삶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반면 로댜는 그야말로 '파멸이 확정된 자'였다. 두 사람을 도끼로 살해했고, 포르피리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으며, 정신은 미쳐가고 있었다.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을 향해 가던 그를 구원한 것은 소냐였다. 소냐가 없었다면 로댜는 광기 속에 죽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아무리 지성적인 인간(이반)이라도 내면의 악한 거울을 만나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반대로 흉악한 죄인(로댜)이라도 선한 타인을 만나면 비로소 부활할 수 있다.

     

    이반과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소냐가 있었다면 부활할 수 있었을까?

    이반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각 두 소설에서 파멸을 맞이하는 인물들이다. 이반은 하인 스메르자코프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일그러졌는지 깨달았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무너지며 사실상 '산 송장'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파멸로 이끈 것은 그나마 내면에 남아있던 양심이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양심마저 제거한 인물이다. 방해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50대의 나이에 16세 소녀를 돈으로 사서 결혼하며, 그녀를 그저 '괜찮은 상품'으로 여긴다. 법과 도덕을 초월한 완벽한 소시오패스다.

     

    로댜의 눈에는 그가 지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초인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지독한 독방에 갇혀 있었다. 두냐를 통해 그 고독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거대한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약 이들에게도 소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반은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기에 스메르자코프 앞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그의 거대하고 오만한 나르시시즘 속에는 소냐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반은 구원의 통로 자체가 막혀버린 자다. 소냐의 구원을 알아보려면 가난하고 낮아진 마음이 필요한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다. 로댜조차 마지막까지 사상을 버리지 못했기에 이반은 불가능에 가깝다.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소냐가 접근했다면, 그는 소냐 역시 16세 신부처럼 철저히 도구로 이용하다 버렸을 것이다. 현실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은 인물 유형이다.

     

     

    3. 높아지려는 자와 낮아지려는 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두 성경 구절은 비신앙인에게도 익숙하다. 특히 두 번째 구절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서문에 놓인 구절이자, 도스토옙스키 유작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이다. 두 작품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와 낮추는 자의 구도는 명확하다.

     

    자기를 높이는 자 (한 알 그대로 썩어버린 자): 이반, 로댜

    자기를 낮추는 자 (죽어서 열매를 맺는 자): 조시마 장로, 알료샤, 소냐

     

    낮아지려는 자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살면서 내면이 좁은 사람이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속이 비어있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초라함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반과 로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외면한 채, 거대한 거짓 자아를 부풀리는 데 몰두했다. 우리 주변에도 자신을 과시하려는 이들이 많다. 재력과 지식을 자랑하고 타인을 깎아내리며 군림하려 든다. 그러나 그 내면은 공허뿐이다. 그들의 과시욕은 실상 약자들이 보이는 처절한 허세에 불과하다. 여기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내 본질을 잃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품어주는 삶의 태도다. 소냐, 조시마 장로, 그리고 알료샤가 보여준 이 모습은, 내면이 거대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다.

     

    낮아진다는 것,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의 의미

    오랜 시간 교회에서  '낮아짐'에 대해 들을 때마다 마음에 소외감이 들곤 했다. 내 개성을 지우고 무조건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냐와 조시마 장로는 그 누구보다 주체성이 강한 인물들이다. 예수 역시 낮아짐을 강조했지만, 타협할 수 없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악한 자들에게는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고, 성전의 기물을 엎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낮아짐'은 주체성을 잃은 바보가 되라거나 가스라이팅을 참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조시마 장로와 소냐의 공통점은 자기 오만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과의 연대와 사랑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밀알이 되는 시작이다.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존재의 말살이 아니다. 독선적인 자아의 껍질을 깨부수고, 타인과 온전히 사랑을 나누는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끝내 썩기를 거부한 채 단단한 껍질을 유지하다가, 결국 고립 속에서 파멸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을까?

    타인을 연민하고 스스로 밀알이 되어 신과 함께하는 길. 이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고통의 길이다. 더 편한 대안은 없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대안을 찾는 모든 여정이 결국 불행과 파멸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악령』을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 속 캐릭터들은 일종의 문학적 실험실에서 돌려본 시뮬레이션이다. 소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한 인물들의 종착지는 예외 없이 파멸이었다. 오직 로댜만 소냐의 희생 덕분에 가까스로 구원받았을 뿐이다.

     

    소냐의 길도 고통이고 다른 길도 고통이라면,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가?

    참으로 마음이 답답해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작가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이 '이지선다'는 피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안은 분명하다. 어차피 통과해야 할 고통이라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구원으로 향하는 소냐의 고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의미 없는 고통'이다"라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삶의 의미란 맹목적인 파멸이 아닌, 구원을 향해 고통을 견뎌내는 승화의 과정이다.

     

    이반의 질문에 대한 소냐의 대답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이반은 물었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시마 장로를 거쳐 소냐를 통해 명확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렌즈로 대답하자면 이렇다.

     

    만약 불의와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신이 기적으로 해결한다면 어떻게 될까? 겉보기엔 유토피아 같겠지만, 그 순간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말살된다. 조시마 장로가 말한 '사랑이 없는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사랑을 실천할 존엄성마저 박탈당한다. 인간은 로봇으로 전락할 뿐이다. 신은 인간을 통제받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다. '사랑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진짜 자유를 부여했다. 부조리와 고통은 대부분 인간이 그 자유를 오용해 이기심을 부렸기에 발생한 결과다. 신은 기적으로 문제를 덮는 대신, 인간이 서로의 짐을 짊어지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비극을 극복하기를 원한다. 파멸해 가던 로댜의 짐을 기꺼이 짊어진 소냐의 삶,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반과 우리에게 주는 대답이다.

     

    4. 하방과 상방 사이에 갇힌 현대인

    작품 후반부에서 로댜는 기괴한 꿈을 꾼다. 각자가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자의식 과잉의 인간들이 넘쳐나 서로를 파멸시키는 꿈이다. 그가 위대하다고 믿었던 오만이 전염병처럼 번져 인류를 파괴하는 장면이다. 자의식만 비대해진 채 타인을 외면하는 아메바 같은 상태를 '하방'이라고 명명해 보았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하방으로 완전히 추락하기는 어렵다. 법, 사회적 평판, 규범이 안전망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 소냐가 택한 길을 '상방'이라고 한다면 이 길은 아무런 통제 장치가 없는, 오롯이 개인의 결단에 열린 공간이다.

     

    상방으로 가는 길

    소냐는 비현실적일 만큼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평면적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선과 악을 오가는 극단적 변수다. 방정식으로 비유하자면 로댜는 요동치는 불확정 변수이고, 소냐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절대 상수'다. 아무리 복잡하게 꼬인 방정식이라도 강력한 절대 상수를 지속적으로 대입하면, 결국 상수가 이끄는 방향으로 수렴한다. 이것이 상방으로 향하는 구조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 사회에 소냐 같은 완벽한 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불안정한 변수들이다. 작가는 이 나약한 변수들에게 예수, 즉 신이라는 절대 상수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하방으로 추락하는 것은 제도가 막아주지만, 상방에 이르는 것은 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스템은 우리를 범죄자로부터 지켜줄 뿐, 우리를 숭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상방을 향한 비상은 오롯이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다.

     

    현대인의 영혼은 하방과 상방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 하방으로 추락할 배짱도 없고, 상방으로 올라갈 겸손도 없는 중간 지대다. 문명이 허락한 안전함 속에서 숨이 막혀가는 상태다. 바로 이 답답한 간격에서 현대인의 내면적 비극이 피어난다. 하방은 제도로 막혀 있고 상방은 스스로 닫아버린 독방.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은 몸집을 불리는 것뿐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높이 올라가며, SNS에 완벽한 삶을 전시한다. 좁은 공간 속에서 "내가 바로 초인"이라 외치며 자아를 부풀린다.

     

    골방에서 자의식 과잉으로 미쳐가던 로댜와 이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닿아 있다. 통로 안에서의 자아 확장은 위나 아래로의 비상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몸집만 부풀리는 격이다. 벽면에 몸이 마찰하며 서서히 숨이 조여오지만, 제도의 안전망이 단단하게 지탱해 주니 파멸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난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어"라며 위안하지만, 이렇게 지속된 삶은 그 말년에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후회와 함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경험한 지독한 공허와 허무를 마주하지 않을까 싶다. 

     

    초인이 되고자 하는 현대인의 선택 - 돈. 

    현대인이 이처럼 좁은 독방 안에서 자아를 부풀리고 스스로 '초인'이 되고자 할 때, 선택하는 가장 손쉽고 강력한 도구는 단연 돈이다.  가난에 갇히면 돈으로 자아를 부풀리는 길마저 막힌다. 사람들은 돈의 부재 때문에 자신의 자아가 확장되지 못함을 괴로워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돈만으로 부풀린 자아는 결국 타인과의 단절을 초래하여 파멸에 이를 뿐이다.

     

    반면 부는 삶의 선택지를 획기적으로 넓혀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패러디한 "돈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물질주의의 상징인 돈으로 바꿨다는 것이 거부감이 들지만 나는 이 말을 일부 동의한다. 가난이 주는 억압과 제한된 삶에서 벗어나, 인생의 선택권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돈은 분명 실존적 해방을 제공하는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돈이 가져다준 그 넓어진 자유를 어디에 쓸 것인가'하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에서 시작된다. 확보된 시간과 자원을 오직 자기 자아만을 위해 쓸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의 연대와 연민을 위해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 두 가지 길 중 어느 한쪽으로만 극단적으로 나뉠 필요는 없다. 삶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어느 쪽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 지금의 나는 자의식을 부풀리거나 나를 과시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런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 자체가 인생의 큰 낭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타인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창한 헌신은커녕, 타인을 향한 깊은 연민을 매번 품지도 못한다. 그저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이 모습 그대로 삶을 마쳐버린다면, 언젠가 깊은 후회가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오만한 초인의 허상도 벗어던졌고 평범한 일상의 편안함에 머물고 있지만, '상방'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 고민마저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는 나지막한 경고음일지도 모른다. 

     

    2026.06.21 - [분류 전체보기]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읽기 - 지적 나르시시즘과 실천적 사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읽기 - 지적 나르시시즘과 실천적 사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내가 20대 후반에 읽다가 포기한 책으로 당시 책의 문장들이 너무 장황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평소 소설보다는 비문학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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